모국인 인도네시아, 싱가폴, 말레이시아, 중국정부나 관계기관으로 부터 열렬한 러브콜을 받아, 각 국에서 강연. 스탄트 교수의 교육에 쏟는 뜨거운 마음은 각국의 고민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분발하게 했다. 그 모습은, 현지 매스미디어에서도 크게 보도되었다. 오래간만에 일본에 돌아온 스탄트 교수에게 3명의 학생이 이야기를 들었다.

(photo :nikkie BP Mr sugano )
Q:교수님의 어린 시절의 모습과 일본에 오게 된 경위를 들려주세요
A:저는 어린 시절에, 부모님을 여의고, 매우 엄격한 할머니에게서 자랐습니다. 몸이 약해서 방해꾼 취급을 당해서 집에서는 좋은 기억이 없었습니다. 집에 있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아침 일찍 등교해 학교 청소를 했습니다. 그 덕분에, 선생님이나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 조금 더 인정을 받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여 반 친구들이나 근처의 어린 아이들에게도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막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1965년, 9.30사건 반공산당 쿠데타로 신 정부가 전국의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학교를 폐쇄하여, 우리들은 교육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형의 전자기계 판매사업을 도와주면서, 저도 수리사업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업이 크게 성공하여, 형이 유복한 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이유로 고등학교와 대학에 갈 수 없었던 저는,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마음을 누를 수 없었습니다.

엔지니어 지망이었던 저는 정밀한 전자제품을 만드는 일본에 자연스레 매료되어, 23세에 일본에 와서 26세에 일반 연령보다 8년 뒤쳐졌지만, 결국 일본 대학에 입학 할 수 있었습니다. 도쿄농공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도쿄 공업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그러나, 34세를 넘어있던 제가 일본에서 취직할 곳은 없었습니다. 일본에서 취직하겠다는 꿈을 접을 수 없어서, 저 자신의 조건을 조금 더 좋게 하기 위해 또 하나의 박사학위를 필사적으로 도전해 취득하였습니다. 그래서, 공학과 의학이라는 2가지 박사학위를 땄지만, 일본에서는 인정받을 수 없었습니다. 일본에서 14년간 죽을 각오로 열심히 살아왔음에도 설마 안될 줄이야... 눈 앞이 캄캄했지만 인생을 재출발하자고 결심해, 일본이 안된다면 다음은 미국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 3명의 어린 자녀들을 남겨두고 38세의 나이로 전혀 미지에다 최고로 레벨이 높다는 미국 과학계에 도전하기로 하였습니다. [ 일단 부딛혀 보자]는 정신으로 한번 더 자신의 인생을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실력을 인정해주는 미국대학이 있어, 그토록 소원하던 교직의 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5년정도 미국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도쿄 공업대학의 은사이신 오쿠시마 교수의 권유로 또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Q:어째서 미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오신 겁니까? 그리고, 대학의 교육혁명에 전념하시게 된 것은 왜이시죠?
A:저는 일본에서 단련되어, 결과적으로는 4개의 박사학위를 땄습니다. 엄격한 일본사회에서 단련된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것입니다. 솔직하게 그 일본에 은혜를 갚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부임한 대학교에서 80퍼센트 이상의 학생이 수업을 이해하지 못해도 그대로 두는 것을 깨달아, 저의 수업을 듣고 있는 전원의 의욕을 불타게 해보자고 결심했습니다.
저는 모국이나 미국에서의 실제 체험담과 일본 사회에서 부정당해도 몇 번이고 도전을 계속한 제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여, 그들을 계속 격려했습니다. 반면에, 수업에는 매우 엄격한 자세로 임했습니다. 수업은 거의 영어로 진행하고, 영어를 사용한 프레젠테이션도 학생들에게 요구했습니다. 처음에는 학생들도 패닉을 일으키지만, 저의 진지한 마음이 전해지니, 학생들도 조금씩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젊은이도 본인 조차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멋진 가능성(잠재능력)을 품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끌어 내주는 것은, 교육자 본연의 자세입니다. 대학에서는, 할 의지를 가진 학생만을 상대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저는 어느 한 사람이라도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교수님에게도 학생들을 내버려두지 말았으면 합니다.

中国の大学の創立100年での記念講演
Q:어린시절, 애정이 풍부하지 않았는데도 교수님의 끝없는 제자 사랑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A:스탄트 교수는 말한다. “저는 한 명 한 명의 학생이 각각의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좋아하고, 자기다운 인생을 보내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중간한 태도여서는 안됩니다. 많은 학생들이 눈물을 흘릴 정도로 저의 수업은 엄격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저는 한 명 한 명의 학생에게 자신의 꿈을 절대로 포기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꿈은 제 자신의 꿈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딱 보았을 때 할 의지가 별로 없는 학생이라 할지라도 미래는 멋진 가능성(=잠재능력)을 품고 있습니다. 저희 교육자에게는 그들의 숨겨진 본심과 진지하게 맞서 목숨을 걸고 수업에 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면 언젠가는 그들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로 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닌 오리지널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큰 자신감으로 이어져 자신을 점점 좋아하게 되고, 이윽고는 다른 사람에게도 친절하게 됩니다. ”

(photo :nikkie BP Mr sugano )
Q:교수님의 어린 시절의 모습과 일본에 오게 된 경위를 들려주세요
A:저는 어린 시절에, 부모님을 여의고, 매우 엄격한 할머니에게서 자랐습니다. 몸이 약해서 방해꾼 취급을 당해서 집에서는 좋은 기억이 없었습니다. 집에 있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아침 일찍 등교해 학교 청소를 했습니다. 그 덕분에, 선생님이나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 조금 더 인정을 받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여 반 친구들이나 근처의 어린 아이들에게도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막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1965년, 9.30사건 반공산당 쿠데타로 신 정부가 전국의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학교를 폐쇄하여, 우리들은 교육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형의 전자기계 판매사업을 도와주면서, 저도 수리사업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업이 크게 성공하여, 형이 유복한 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이유로 고등학교와 대학에 갈 수 없었던 저는,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마음을 누를 수 없었습니다.
엔지니어 지망이었던 저는 정밀한 전자제품을 만드는 일본에 자연스레 매료되어, 23세에 일본에 와서 26세에 일반 연령보다 8년 뒤쳐졌지만, 결국 일본 대학에 입학 할 수 있었습니다. 도쿄농공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도쿄 공업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그러나, 34세를 넘어있던 제가 일본에서 취직할 곳은 없었습니다. 일본에서 취직하겠다는 꿈을 접을 수 없어서, 저 자신의 조건을 조금 더 좋게 하기 위해 또 하나의 박사학위를 필사적으로 도전해 취득하였습니다. 그래서, 공학과 의학이라는 2가지 박사학위를 땄지만, 일본에서는 인정받을 수 없었습니다. 일본에서 14년간 죽을 각오로 열심히 살아왔음에도 설마 안될 줄이야... 눈 앞이 캄캄했지만 인생을 재출발하자고 결심해, 일본이 안된다면 다음은 미국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 3명의 어린 자녀들을 남겨두고 38세의 나이로 전혀 미지에다 최고로 레벨이 높다는 미국 과학계에 도전하기로 하였습니다. [ 일단 부딛혀 보자]는 정신으로 한번 더 자신의 인생을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실력을 인정해주는 미국대학이 있어, 그토록 소원하던 교직의 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5년정도 미국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도쿄 공업대학의 은사이신 오쿠시마 교수의 권유로 또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Q:어째서 미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오신 겁니까? 그리고, 대학의 교육혁명에 전념하시게 된 것은 왜이시죠?
A:저는 일본에서 단련되어, 결과적으로는 4개의 박사학위를 땄습니다. 엄격한 일본사회에서 단련된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것입니다. 솔직하게 그 일본에 은혜를 갚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부임한 대학교에서 80퍼센트 이상의 학생이 수업을 이해하지 못해도 그대로 두는 것을 깨달아, 저의 수업을 듣고 있는 전원의 의욕을 불타게 해보자고 결심했습니다.
저는 모국이나 미국에서의 실제 체험담과 일본 사회에서 부정당해도 몇 번이고 도전을 계속한 제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여, 그들을 계속 격려했습니다. 반면에, 수업에는 매우 엄격한 자세로 임했습니다. 수업은 거의 영어로 진행하고, 영어를 사용한 프레젠테이션도 학생들에게 요구했습니다. 처음에는 학생들도 패닉을 일으키지만, 저의 진지한 마음이 전해지니, 학생들도 조금씩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젊은이도 본인 조차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멋진 가능성(잠재능력)을 품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끌어 내주는 것은, 교육자 본연의 자세입니다. 대학에서는, 할 의지를 가진 학생만을 상대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저는 어느 한 사람이라도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교수님에게도 학생들을 내버려두지 말았으면 합니다.
中国の大学の創立100年での記念講演
Q:어린시절, 애정이 풍부하지 않았는데도 교수님의 끝없는 제자 사랑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A:스탄트 교수는 말한다. “저는 한 명 한 명의 학생이 각각의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좋아하고, 자기다운 인생을 보내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중간한 태도여서는 안됩니다. 많은 학생들이 눈물을 흘릴 정도로 저의 수업은 엄격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저는 한 명 한 명의 학생에게 자신의 꿈을 절대로 포기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꿈은 제 자신의 꿈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딱 보았을 때 할 의지가 별로 없는 학생이라 할지라도 미래는 멋진 가능성(=잠재능력)을 품고 있습니다. 저희 교육자에게는 그들의 숨겨진 본심과 진지하게 맞서 목숨을 걸고 수업에 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면 언젠가는 그들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로 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닌 오리지널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큰 자신감으로 이어져 자신을 점점 좋아하게 되고, 이윽고는 다른 사람에게도 친절하게 됩니다. ”